홍지석(미술 비평, 단국대 교수)
JI-SEOK, HONG(AN ART CRITIC AND A PROFESSOR OF DANKUK UNIVERSITY)
2015
언젠가 어떤 영문텍스트를 번역하는 중에 영단어 ‘개념(concept)’과 ‘지각(perception)’의 의미가 어원상 거의 유사하다는 것을 알고 깜짝 놀란 적이 있다. 개념(concept)이 “함께(con)”와 “잡다(-ceive)”가 결합된 단어라면 지각(perception)은 “완전히(per)”와 “잡다(-ceive)”가 결합된 단어다. 즉 두 단어는 모두 이리저리, 또는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것을 수집, 종합하는 인간능력을 지시하고 있다. 이렇듯 분산된 것들을 통합하는 능력은 인식의 층위(개념)에서도 감각의 층위(지각)에서도 모두 중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은 모두 “분산된 세계에 맞서 투쟁하는 수집가”(발터 벤야민)이다. 그는 오감을 동원해 감각정보를 수집하고 또 온갖 지적탐구를 통해 지식을 수집한다. 그리고 그렇게 수집된 것들은 인간 삶을 지탱하는 든든한 버팀목이 된다.
여기저기 흩어진 것들을 종합하는 능력은 나를 나로 확인하는 일, 곧 정체성(identity)의 수립에도 중요하다.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 또는 이 사람을 만날 때의 나와 저 사람을 만날 때의 나는 같은 나인가? 서로 다른 나(들)를 하나로 종합해 “나”를 확인하는 일은 절체절명의 과제다. 그것이 실패하면 나는 ‘정신분열’의 상태에 놓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종합(또는 일반화)’은 역시 인간 삶의 본질적인 과제라고 해야 한다.
서유라의 작업은 회화라는 매체를 통해 “인간의 종합하는 능력”을 탐구하려는 시도다. 첫 번째 개인전 “책을 쌓다”(2007)에서 서유라는 캔버스 화면 전체에 펼친 또는 닫힌 책들이 겹겹이 쌓여있는 장관을 선보였다. 그녀는 이러한 ‘책 쌓기’를 ‘블록 쌓기’에 비유한 적이 있다. 장난감 블록들을 결합해 뭔가를 만들 듯, 책들을 결합해 어떤 전체를 만든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그녀는 이러한 관계를 삶의 양상에 비유했다.
그러니까 “책을 쌓는” 서유라의 작업은 처음에는 “세월을 쌓는 일” 그러니까 ‘내 삶을 채워나가는 일“의 유비(analogy)였다. 그리고 그것은 그 때 블록을 쌓는 ’놀이‘와 등가의 의미치를 지니고 있었다. 그러니 간단히(어쩌면 순진하게) ”새로 쌓은 것은 다시금 허물어야 할 것“이라고 말할 수 있었을 게다.
2007년 전시 때 서유라가 보여준 화면, 곧 책들이 빽빽하게 불규칙하게 쌓여있는 화면은 구조적으로 매우 위태로워 보인다. 또는 갑갑하게 보인다. 또한 서유라는 책들을 쌓아 ‘어떤 것’을 만들었으나 그 ‘어떤 것’이 무엇인지는 매우 불투명했다. 종합의 단서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이를테면 책제목, 또는 툭 튀어나온 파편적 이미지들) 매끄러운 종합은 사실상 불가능한 구조! 나로서는 그 어떤 것이란 기실 ‘종합(개념, 지각, 정체성…)일반’의 위태로운 구조가 아니었나 싶다. 우리가 그렇다고 믿는 것과는 달리 인간의 종합은 항상 불완전하고 위태로운 것이다. 메를로- 퐁티의 말처럼 가령 “과거와 미래에 대한 나의 파악은 지레짐작의 것”으로서 “취약하고 잠정적이다” 그 불완전한 것을 매끄럽게 다듬기 보다는 불완전한 그 자체로 드러내는 것이 서유라 초기 작업의 특성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서유라의 작업은 점차 메타 수준에서 “그 자체 불완전한” 종합의 구조를 드러내는 것으로부터 현실 수준에서 진행되는 “종합의 수행”으로 이행하게 된다. 즉 종합의 일반양태를 그리기보다는 그녀 자신이 종합을 수행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서유라는 자신의 ‘책 쌓기’에 어떤 질서를 부여하기 시작한다. 그것은 양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먼저 그녀는 마치 도서관 사서처럼 특정 주제(개념)에 따라 책들을 수집하고 그 책들을 쌓았다. 이를테면 <Korean Artist>(2008), <France Artist>(2008)는 ‘미술-국가’의 관점에서 관련 책들을 수집하여 쌓은 것을 그린 작품들이다. 이 시기의 서유라는 개념-주도의 학습을 진행 중인 학생처럼 보인다. 가령 <진화론>(2008>과 같은 작품들에서 우리는 ‘진화론’과 관련된 책들이 쌓여 있는 것을 보게 된다. 그것은 진화론에 대한 이 작가의 학습 수준을 드러낼 것이다. 실제로 이 시기의 많은 작품들에 서유라는 ‘공부도’라는 명칭을 부여했다. 이와 병행하여 감각이 주도하는 형식의 수준에서도 질서를 부여하는 작업이 전개되었다. 이것은 한편으로 색채조화론의 견지에서 화면에 적용된 색채를 조율하는 방식으로, 또 다른 한편으로 책 쌓기에 식별가능한 형태(이를테면 하트, 별, 꽃처럼 보이는 형태들)를 부여하는 방식으로 전개되었다. 이로써 서유라 회화의 기본단위로서 책들은 내용(개념), 색채, 형태에 따라 정돈될 수 있었다.
그러나 서유라의 경우에 그러한 질서는 어디까지나 잠정적이고 불완전한 질서다. 질서를 포함해 인간이 행하는 종합은 항상 불완전한 위태로운 것이라는 것! 이것은 처음부터 서유라 작업의 근간을 이뤘던 전제다. 학습의 결과, 또는 개념의 정립은 언제나 불충분한 미완의 상태였고 색채의 조화를 (미약하게나마)거스르는 것은 항상 존재했으며 그 형태들(하트, 별, 꽃의 형태들)은 늘 느슨하고 위태로워 보인다.
그리고 꽤 오랜 기간 서유라는 분산된 것들, 또는 흩어진 부분들을 -느슨하게나마-어떤 범주나 체계, 질서에 종합하는 실험을 계속해왔다. 2015년 대전시립미술관 전시에서 우리는 그러한 종합이 꽤 흥미로운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먼저 우리의 시선을 끄는 것은 ‘Vintage Books’ 또는 ‘Classic Books’라는 이름이 붙은 연작들이다. 이 작품들에서 우리는 흩어져 있던 과거의 파편들-고서들, 옛 아이콘들(가령 미키마우스나 덤보), 낡은 시계들의 이미지-이 하나의 화면에 종합되어 있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이것은 작가가 ‘시간의 종합’이라는 철학자와 과학자들의 오랜 과제를 자신의 과제로 삼고 있다는 것을 일러준다. 여기서 과거의 시간, 경험의 지층, 기억의 심층에서 퍼 올린 낡은 것들은 현재적 지평에서 종합되어 새로운 의미를 얻고 있다. 2015년 전시에서 특히 흥미로운 작품은 <Harmony Books>(2015)라고 이름 붙여진 작품들이다. 이것은 지금까지 내용(개념)과 형식(지각)으로 나눠서 진행되던 종합이 이제 본격적으로 하나로 종합되기 시작되고 있음을 시사한다. 이 작품은 개념으로서 ‘harmony’ 곧 ‘조화’의 탐구이면서 동시에 감각 층위에서 진행되던 형식적 조화의 즉자적(literal) 구현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작품은 작가가 ‘종합의 종합’, ‘질서의 질서’를 탐구과제로 삼게 되었음을 말해준다.
<Harmony Books>가 특히 흥미로운 것은 이 작품에서 선택된 틀이 ‘개념’도 아니고 ‘형태’도 아니며 악기케이스라는 현실에 존재하는 ‘사물’이라는 점 때문이다. 그리고 그 안에 채워진 것은 마찬가지로 현실에 존재하는 책들이다. 그 속에 포함되기 위해 그 책들은 절단되었다. 악기케이스 안에 빽빽하게 채워진 책들, 이미지들의 존재양상은 지금까지 서유라 작품에 등장한 어떤 관계들보다도 견고하고 단단해 보인다. 여기서 나는 책 쌓기를 ‘놀이’에 비유하면서 “새로 쌓은 것은 다시금 허물어야 할 것이 되고, 그렇게 나는 분주히 움직인다”고 했던 과거의 서유라의 흔적을 거의 찾을 수 없다. 그러나 그 대신 우리는 이로부터 ‘삶’에 대한 뜻밖의 응시와 성찰을 목도하게 된다. 삶이란 그렇지 않던가? 처음에는 그저 삶의 필요에 의해 설정된 개념이, 그리고 삶에 질서를 부여하기 위해 채택한 형태와 형식이 정착되고 확고해지는 순간 존재를 억압하는 틀이 되는 것을 우리는 흔히 목격하게 된다(가령 오늘 아침에도 나는 누군가를 “저런 개념 없는 사람” 이라고 비난했다) 그러니까 <Harmony Books>에 이르러 서유라는 종합의 잠정적, 불완전한 양태가 아니라 그 잠정적이고 불완전한 것이 마치 영구불변의 완전한 것처럼 되어 도그마로 행세하는 양태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아닐까? 이런 추측을 긍정하는 한에서 서유라는 과거보다 좀더 ‘현실(reality)’에 가까워졌다고 해야 할지 모른다. 그러나 물론 이 작가는 (현실의 우리들처럼)그 억압적 상황에 쉽사리 매몰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이 얼마나 불안하고 취약한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까닭이다.
A RESEARCH ON SYNTHESIS : RECENT WORKS OF YURA, SEO
I was very surprised when I first found that the word ‘concept’ and ‘perception’ share almost the same meaning in their derivation. While the word ‘concept’ is a combination of ‘together(con)’ and ‘seize(-ceive)’, the word ‘perception’ is a combination of ‘completely(per)’ and ‘seize(-ceive)’. That is to say, both words indicate the capability of humans to collect and synthesize the things spread everywhere. So, the capability to unite separated things is very important both in the layer of recognition(concept) and in the layer of sense(perception). In this point of view, all humans can be the ‘collectors struggle with the separated world’(from Walter Benjamin). They collect sensory information with five senses and also collect knowledge with every possible intellectual search, and eventually those collected products become a firm prop to support the life of humans.
This capability to synthesize the things scattered here and there is also important to establish one’s identity. Can a ‘you’ in different times with different people be indeed considered the same ‘you’? It is a desperate assignment to synthesize those different you and identify who the real ‘you’ would be. This explains why the ‘synthesis(or generalization)’ should be one of the most essential matters of human life.
The artworks of Yura, Seo intend to search ‘human capability to synthesize’ through the media of paintings. In her first private exhibition ‘Stack Books(2007)’, she showed an amazing sight of open or closed books being stacked in the whole canvas. Once she compared this ‘Book Stacking’ with ‘Blocks Building’. She said that she makes something with the combination of books just like the children make something with that of blocks. She, by extension, compared this connection with the aspect of lif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