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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의 탐구: 서유라의 근작들

홍지석(미술 비평, 단국대 교수)
JI-SEOK, HONG(AN ART CRITIC AND A PROFESSOR OF DANKUK UNIVERSITY)

2015

 

언젠가 어떤 영문텍스트를 번역하는 중에 영단어 ‘개념(concept)’과 ‘지각(perception)’의 의미가 어원상 거의 유사하다는 것을 알고 깜짝 놀란 적이 있다. 개념(concept)이 “함께(con)”와 “잡다(-ceive)”가 결합된 단어라면 지각(perception)은 “완전히(per)”와 “잡다(-ceive)”가 결합된 단어다. 즉 두 단어는 모두 이리저리, 또는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것을 수집, 종합하는 인간능력을 지시하고 있다. 이렇듯 분산된 것들을 통합하는 능력은 인식의 층위(개념)에서도 감각의 층위(지각)에서도 모두 중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은 모두 “분산된 세계에 맞서 투쟁하는 수집가”(발터 벤야민)이다. 그는 오감을 동원해 감각정보를 수집하고 또 온갖 지적탐구를 통해 지식을 수집한다. 그리고 그렇게 수집된 것들은 인간 삶을 지탱하는 든든한 버팀목이 된다.

여기저기 흩어진 것들을 종합하는 능력은 나를 나로 확인하는 일, 곧 정체성(identity)의 수립에도 중요하다.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 또는 이 사람을 만날 때의 나와 저 사람을 만날 때의 나는 같은 나인가? 서로 다른 나(들)를 하나로 종합해 “나”를 확인하는 일은 절체절명의 과제다. 그것이 실패하면 나는 ‘정신분열’의 상태에 놓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종합(또는 일반화)’은 역시 인간 삶의 본질적인 과제라고 해야 한다.

서유라의 작업은 회화라는 매체를 통해 “인간의 종합하는 능력”을 탐구하려는 시도다. 첫 번째 개인전 “책을 쌓다”(2007)에서 서유라는 캔버스 화면 전체에 펼친 또는 닫힌 책들이 겹겹이 쌓여있는 장관을 선보였다. 그녀는 이러한 ‘책 쌓기’를 ‘블록 쌓기’에 비유한 적이 있다. 장난감 블록들을 결합해 뭔가를 만들 듯, 책들을 결합해 어떤 전체를 만든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그녀는 이러한 관계를 삶의 양상에 비유했다.

그러니까 “책을 쌓는” 서유라의 작업은 처음에는 “세월을 쌓는 일” 그러니까 ‘내 삶을 채워나가는 일“의 유비(analogy)였다. 그리고 그것은 그 때 블록을 쌓는 ’놀이‘와 등가의 의미치를 지니고 있었다. 그러니 간단히(어쩌면 순진하게) ”새로 쌓은 것은 다시금 허물어야 할 것“이라고 말할 수 있었을 게다.

2007년 전시 때 서유라가 보여준 화면, 곧 책들이 빽빽하게 불규칙하게 쌓여있는 화면은 구조적으로 매우 위태로워 보인다. 또는 갑갑하게 보인다. 또한 서유라는 책들을 쌓아 ‘어떤 것’을 만들었으나 그 ‘어떤 것’이 무엇인지는 매우 불투명했다. 종합의 단서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이를테면 책제목, 또는 툭 튀어나온 파편적 이미지들) 매끄러운 종합은 사실상 불가능한 구조! 나로서는 그 어떤 것이란 기실 ‘종합(개념, 지각, 정체성…)일반’의 위태로운 구조가 아니었나 싶다. 우리가 그렇다고 믿는 것과는 달리 인간의 종합은 항상 불완전하고 위태로운 것이다. 메를로- 퐁티의 말처럼 가령 “과거와 미래에 대한 나의 파악은 지레짐작의 것”으로서 “취약하고 잠정적이다” 그 불완전한 것을 매끄럽게 다듬기 보다는 불완전한 그 자체로 드러내는 것이 서유라 초기 작업의 특성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서유라의 작업은 점차 메타 수준에서 “그 자체 불완전한” 종합의 구조를 드러내는 것으로부터 현실 수준에서 진행되는 “종합의 수행”으로 이행하게 된다. 즉 종합의 일반양태를 그리기보다는 그녀 자신이 종합을 수행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서유라는 자신의 ‘책 쌓기’에 어떤 질서를 부여하기 시작한다. 그것은 양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먼저 그녀는 마치 도서관 사서처럼 특정 주제(개념)에 따라 책들을 수집하고 그 책들을 쌓았다. 이를테면 <Korean Artist>(2008), <France Artist>(2008)는 ‘미술-국가’의 관점에서 관련 책들을 수집하여 쌓은 것을 그린 작품들이다. 이 시기의 서유라는 개념-주도의 학습을 진행 중인 학생처럼 보인다. 가령 <진화론>(2008>과 같은 작품들에서 우리는 ‘진화론’과 관련된 책들이 쌓여 있는 것을 보게 된다. 그것은 진화론에 대한 이 작가의 학습 수준을 드러낼 것이다. 실제로 이 시기의 많은 작품들에 서유라는 ‘공부도’라는 명칭을 부여했다. 이와 병행하여 감각이 주도하는 형식의 수준에서도 질서를 부여하는 작업이 전개되었다. 이것은 한편으로 색채조화론의 견지에서 화면에 적용된 색채를 조율하는 방식으로, 또 다른 한편으로 책 쌓기에 식별가능한 형태(이를테면 하트, 별, 꽃처럼 보이는 형태들)를 부여하는 방식으로 전개되었다. 이로써 서유라 회화의 기본단위로서 책들은 내용(개념), 색채, 형태에 따라 정돈될 수 있었다.

그러나 서유라의 경우에 그러한 질서는 어디까지나 잠정적이고 불완전한 질서다. 질서를 포함해 인간이 행하는 종합은 항상 불완전한 위태로운 것이라는 것! 이것은 처음부터 서유라 작업의 근간을 이뤘던 전제다. 학습의 결과, 또는 개념의 정립은 언제나 불충분한 미완의 상태였고 색채의 조화를 (미약하게나마)거스르는 것은 항상 존재했으며 그 형태들(하트, 별, 꽃의 형태들)은 늘 느슨하고 위태로워 보인다.

그리고 꽤 오랜 기간 서유라는 분산된 것들, 또는 흩어진 부분들을 -느슨하게나마-어떤 범주나 체계, 질서에 종합하는 실험을 계속해왔다. 2015년 대전시립미술관 전시에서 우리는 그러한 종합이 꽤 흥미로운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먼저 우리의 시선을 끄는 것은 ‘Vintage Books’ 또는 ‘Classic Books’라는 이름이 붙은 연작들이다. 이 작품들에서 우리는 흩어져 있던 과거의 파편들-고서들, 옛 아이콘들(가령 미키마우스나 덤보), 낡은 시계들의 이미지-이 하나의 화면에 종합되어 있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이것은 작가가 ‘시간의 종합’이라는 철학자와 과학자들의 오랜 과제를 자신의 과제로 삼고 있다는 것을 일러준다. 여기서 과거의 시간, 경험의 지층, 기억의 심층에서 퍼 올린 낡은 것들은 현재적 지평에서 종합되어 새로운 의미를 얻고 있다. 2015년 전시에서 특히 흥미로운 작품은 <Harmony Books>(2015)라고 이름 붙여진 작품들이다. 이것은 지금까지 내용(개념)과 형식(지각)으로 나눠서 진행되던 종합이 이제 본격적으로 하나로 종합되기 시작되고 있음을 시사한다. 이 작품은 개념으로서 ‘harmony’ 곧 ‘조화’의 탐구이면서 동시에 감각 층위에서 진행되던 형식적 조화의 즉자적(literal) 구현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작품은 작가가 ‘종합의 종합’, ‘질서의 질서’를 탐구과제로 삼게 되었음을 말해준다.

<Harmony Books>가 특히 흥미로운 것은 이 작품에서 선택된 틀이 ‘개념’도 아니고 ‘형태’도 아니며 악기케이스라는 현실에 존재하는 ‘사물’이라는 점 때문이다. 그리고 그 안에 채워진 것은 마찬가지로 현실에 존재하는 책들이다. 그 속에 포함되기 위해 그 책들은 절단되었다. 악기케이스 안에 빽빽하게 채워진 책들, 이미지들의 존재양상은 지금까지 서유라 작품에 등장한 어떤 관계들보다도 견고하고 단단해 보인다. 여기서 나는 책 쌓기를 ‘놀이’에 비유하면서 “새로 쌓은 것은 다시금 허물어야 할 것이 되고, 그렇게 나는 분주히 움직인다”고 했던 과거의 서유라의 흔적을 거의 찾을 수 없다. 그러나 그 대신 우리는 이로부터 ‘삶’에 대한 뜻밖의 응시와 성찰을 목도하게 된다. 삶이란 그렇지 않던가? 처음에는 그저 삶의 필요에 의해 설정된 개념이, 그리고 삶에 질서를 부여하기 위해 채택한 형태와 형식이 정착되고 확고해지는 순간 존재를 억압하는 틀이 되는 것을 우리는 흔히 목격하게 된다(가령 오늘 아침에도 나는 누군가를 “저런 개념 없는 사람” 이라고 비난했다) 그러니까 <Harmony Books>에 이르러 서유라는 종합의 잠정적, 불완전한 양태가 아니라 그 잠정적이고 불완전한 것이 마치 영구불변의 완전한 것처럼 되어 도그마로 행세하는 양태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아닐까? 이런 추측을 긍정하는 한에서 서유라는 과거보다 좀더 ‘현실(reality)’에 가까워졌다고 해야 할지 모른다. 그러나 물론 이 작가는 (현실의 우리들처럼)그 억압적 상황에 쉽사리 매몰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이 얼마나 불안하고 취약한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까닭이다.


A RESEARCH ON SYNTHESIS : RECENT WORKS OF YURA, SEO

 

I was very surprised when I first found that the word ‘concept’ and ‘perception’ share almost the same meaning in their derivation. While the word ‘concept’ is a combination of ‘together(con)’ and ‘seize(-ceive)’, the word ‘perception’ is a combination of ‘completely(per)’ and ‘seize(-ceive)’. That is to say, both words indicate the capability of humans to collect and synthesize the things spread everywhere. So, the capability to unite separated things is very important both in the layer of recognition(concept) and in the layer of sense(perception). In this point of view, all humans can be the ‘collectors struggle with the separated world’(from Walter Benjamin). They collect sensory information with five senses and also collect knowledge with every possible intellectual search, and eventually those collected products become a firm prop to support the life of humans.
This capability to synthesize the things scattered here and there is also important to establish one’s identity. Can a ‘you’ in different times with different people be indeed considered the same ‘you’? It is a desperate assignment to synthesize those different you and identify who the real ‘you’ would be. This explains why the ‘synthesis(or generalization)’ should be one of the most essential matters of human life.

The artworks of Yura, Seo intend to search ‘human capability to synthesize’ through the media of paintings. In her first private exhibition ‘Stack Books(2007)’, she showed an amazing sight of open or closed books being stacked in the whole canvas. Once she compared this ‘Book Stacking’ with ‘Blocks Building’. She said that she makes something with the combination of books just like the children make something with that of blocks. She, by extension, compared this connection with the aspect of life.

심부(深部)로 들어가 책들의 기표(記標)에 가 닿는 도서기행 - 서유라의 “소울 트립SOUL TRIP”을 깊게 듣는 법

김종길(미술 평론가)

2011

 

서유라 작가의 회화적 소재는 책이다. 그는 책을 그린다. 2007년 첫 개인전의 주제가 “책을 쌓다”였으니, 최소한으로 잡아도 5년여를 온전히 책을 그리는데 바친 셈이다. 소재주의가 아닐까 하는 의구심을 떨칠 수 없는데, 그럼에도 한결같이 책이라는 소재를 놓지 않은 데는 다른 이유가 있어 보인다. 그는 책을 통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것일까? 우리는 여기서 몇 가지 사실과 개념적 특징으로 그 의문에 다가설 수 있으리라고 본다.

첫째, 책을 그린다는 것은 책의 회화적 재현이라 할 수 있다. 일명 그의 ‘책 회화’는 책의 외피에 집중되어 있으므로 책이라는 가시적 물성(오브제로서의 시각적 현실)을 재현하는 것이 하나의 목표가 아닐까 생각된다. 우리가 책을 의식하거나 인지하는 방식은 많은 부분 책의 표지에 달려있다. 실제로 그는 작품의 주제가 되는 어떤 책들에 대해 집요한 그리기를 시도하는데, 대부분 책의 표지다. 책은 출판과 더불어 하나의 얼굴을 갖게 되고 그 얼굴은 독자들에게 선명하게 기명(記銘)된다. 그러므로 그는 책의 초상을 전신사조(傳神寫照)의 미학으로 재현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책의 초상을 그려 그 정신을 전하려는 의지라고 해야 할까. 그러나 많은 작품들에서 발견되듯이 그러한 인식의 투영은 몇 몇 책들에 한정될 뿐 재현된 책들의 대부분은 그의 사념에 따라 재구성되고 재탄생된 것들이다. 색이 바뀌고 글이 엉킨 것들. 지워지거나 덧칠해지는 사이에 책들은 그가 구상하는 회화적 구도에 따라 혹은 주제에 따라 새 옷을 입는다. 그러니 그의 회화적 재현은 대상의 가시적 사실성만을 복원하는 것이라 단정할 수 없다. 재현의 개념은 서유라에게 단지 미학적 형식이면서 트릭에 가까운 무엇으로 해석된다.

<여행, 색에 물들다(Soul Trip)>는 이번 전시의 주제 ‘Soul Trip’을 재현한 것이다. ‘마음의 여행’이라 해야 할지 ‘정신의 여행’이라 해야 할지 다소간 모호한 측면이 없지 않지만, 여행보다는 ‘Soul’이 강조되는 것은 그가 재현해 놓은 책의 심리적 무게 때문이다. 그의 장면은 여행지의 이국적 풍경이나 낯선 야생지와는 무관하게 그저 책과 책등에 명기된 텍스트에 주목한다. 흐트러진 채 쌓여있는 책들이 우리의 복잡다단한 일상과 헝클어진 도시적 삶을 직유법으로 제시한 것이라면, 보랏빛 색조로 물들인 이미지의 잔상은 현실로부터 이탈하지 못하는 그래서 여행이란 것이 부풀어 오른 탈현실적 욕망일 수 있음을 드러낸다. 낱개의 책들에 새겨진 책제목은 그래서 그런 심리적 기제를 재현하는 실체라고 할 수 있다. 예컨대, 그 낱말들은 제목이면서 시행(詩行)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소울 트립
여행, 色에 물들다
대한민국 숨은 여행 찾기
소도시 여행의 로망
죽기 전에 꼭 봐야 할 자연 절경 1001

지구촌 사람들 지구촌 이야기
내 마음에 마법을 건 나라 뉴질랜드
뉴욕, 아트 인 더 시티
런던 프로젝트 
오후 5시 동유럽의 골목을 걷다

탐험지도의 역사
인도에서 여행을 멈추다 

그렇다면 그가 재현하려는 본심은 무엇일까? 시행처럼 배열해 놓은 텍스트를 다시 살피자. 책의 꼴과 그 꼴에 새겨진 텍스트. 그것은 다름 아닌 기표(記標)가 아닌가! 

둘째, 그의 회화가 책의 등과 표지에 주목하는 것은 ‘책의 기표(signifiant)’를 재현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소쉬르의 기호이론에 따르면 책의 표지는 ‘소리’에 해당한다. 말은 소리와 그 소리의 의미로 성립되듯이, 책의 표지는 눈으로 듣는 소리로써 의미를 전달하는 외적 형식이다. 책 디자인에서 가장 어렵고 섬세한 부분이 바로 책의 표지다. 책의 표지는 기표로서 ‘말’에 해당한다. 앞표지 뒤표지 등(두께를 말하며 세네카 (seneca)라고 함) 그리고 날개에 이르는 각 면의 구성은 색과 글자체, 정보량에 따라 각양각색이 된다. 몇 개의 시안을 고르고 수정하고 다듬어서 한 눈에 책의 소리를 듣도록 유도하는 것이 책 디자인의 목표인 것. 서유라는 이러한 책의 표지가 타전하는 기표를 재현한다. 그러므로 작품의 제목은 결과보다 먼저 제시될 수밖에 없다. 예컨대 <남녀심리학>이나 <여왕의 시대>, <여자생활백서>등 거의 모든 작품들의 제목은 연역적 사유의 결과물이다. 작품 속의 책들은 이러한 주제에 따라 선별적으로 취사선택되어 재구성된다. 그런데 이런 기호적 장치들이 전면화 되어 있다고 보기에는 작가의 주관적 시선이 매우 강하다. 그의 작품들은 그가 배치하는 방식에 따라 화면을 구축한다. 쌓고 펼치고 세우고 꺼내고 뒤집고, 이리저리 이것저것 섞어 놓은 풍경이 주제의 내러티브와 상관하고 있음을 뒤늦게 눈치채는 이유다.

작품 <인간의 내밀한 역사>는 시어도어 젤딘(Theodore Zeldin)이 짓고 김태우가 옮긴 동명의 책 『인간의 내밀한 역사-마음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인류의 경험에 관한 기록』에서 따온 것인데, 작품의 주제 컷도 이 책을 전면에 내세운다. 익히 낯설지 않게 보아온 이 책의 표지는 이미 ‘그 책을 알고 있다’는 전제를 상기시키면서 묘한 시력을 당기고 놓는다. 표지는 반신 누드의 여성과 그 여성의 젖꼭지를 살짝 꼬집듯이 잡고 있는 손의 인상이 사뭇 요기(妖奇)롭게 그려진 회화가 배경이다. 그러니 인상에 콕 박혀서 지워지지 않을 터. 그런데 이 책을 받치고 선 풍경은 ‘최초의 것들’, ‘What Life Was Like’, ‘세계사-동아시아와 그리스’, ‘대세계의 역사’, ‘전쟁의 역사’, ‘광기와 우연의 역사’, ‘권력과 탐욕의 역사’와 같은 제목의 책들이다. 『인간의 내밀한 역사』가 내밀한 역사보기라는 작가적 사유를 증언하는 것이라면, 책등의 텍스트는 사유의 증언을 말로써 외치는 소리와 같다. 많은 역사서에서 이렇듯 주관적 선택에 의해 선별된 책들의 텍스트는 작품을 시각적 재현에서 상징재현으로 읽히게 한다. 

<영화의 유혹>은 그런 측면에서 심리적 상징이 책의 재현을 넘어선다. 이 작품의 특징은 표지와 책등, 그리고 텍스트가 강조되지 않는단 점이다. ‘영화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이 선명하게 부각될 뿐 많은 책들은 그저 이름 없이 옆으로 밑으로 위로 밀치고 들어가 자신을 숨기고 있다. 우리가 알아 볼 수 있는 텍스트는 단지 몇 개에 불과하다. ‘여성영화산책’이나 ‘찰리 채플린’, ‘디지털 시네마’, ‘영화예술’, ‘세계 영화사’, ‘죽기 전에 봐야 할 영화 1001’, ‘뉴미디어 아트’, ‘스타워즈’ 정도가 있을 뿐이다. 이 책들 사이사이에서 많은 책들은 자신들을 빼곡히 ‘끼워넣기’ 하고 있다. 이 ‘끼워넣기’의 욕망은 작가의 주관적 시선에서 비롯된다. 영화의 유혹은 어쩌면 아는 것보다 아직 알 수 없는 그 무엇들에서 시작될 테니까. 

셋째, 책의 회화적 재현은 책의 기표를 재현하는 것이면서 동시에 ‘상징화’를 의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때 책의 표지는 기표이면서 기의(signifié)가 된다. 말의 소리가 기표였다면 소리의 의미가 기의일 터인데, 서유라는 책의 등과 표지, 혹은 간간히 내비치는 내지를 통해 그가 말하고자하는 주제의 의미를 함축하고 발산시킨다. 작품이 기의로 읽힐 때 책은 물성이 아닌 상징으로 환유된다. 물성을 강조했다면 집요한 그리기의 극사실적 표현이 보다 중요하다고 판단해야겠지만, 이책 저책을 모두 모아 이렇게 저렇게 배열한 뒤 그리고 지우고 다시 의미를 삽입하는 과정은 책의 소리와 더불어 의미를 생성하기 위한 전략으로 밖에는 생각할 수 없다. 작품제목이 강조하는 주제에 따라 회화의 주조색이 정해지고 또한 그에 따른 대표이미지와 책이 선별되며, 기표로 읽히는 것과 읽히지 않을 것들을 조절하는 그의 행위는 상징화를 위한 치밀한 계산인 것이다. 

<Erotic Art>를 보자. 이 작품 속 책들은 붉다. 배경도 핑크 빛이다. 이제 책들은 책이면서 완전한 기표가 되었다. 그리고 그 기표는 다시 붉은 소리의 기의로 확산된다. 붉은 책들의 붉은 소리는 색과 상징이며, 이때 색은 에로틱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것이고 상징은 여성성과 상관한다. 기표와 기의가 만나서 하나의 소리 즉, 외침을 타전한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외침은 각 텍스트가 보여주는 바 ‘행동성(activity)’이다. ‘여성, 섹슈얼리티, 국가’는 여성주의 시선으로 파고 든 제도적 성정체성에 관한 저항적 외침이라면, ‘여성 미술 사회’는 여성이라는 주체가 또는 여성이 주체가 된 미술이 사회와 어떻게 결절을 만들어 내는지 보여주는 책이다. ‘한국의 풍속화’나 ‘The Erotic Korea’, ‘화가는 왜 여자를 그리는가’, ‘성의 미학’, ‘한국의 성’, ‘우리 몸과 미술’, ‘위대한 페미니스트 울스틴 크래프트의 혁명적 생애-세상을 뒤바꾼 열정’은 그 제목만으로도 작품의 에로틱이 왜 여성성을 상징하는지 알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책들 사이에서 ‘한국 회화의 이해’라는 책 한권을 발견하게 된다. 사실 한국 회화의 이해든 세계 미술사든 여성의 주체가 된 미술은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미술은 그동안 결코 에로틱하지 않았던 것이다. 슬쩍 내 비치는 춘화도는 에로틱의 상징이 아니라 성을 대상화 한 것에 불과하며, 그 대상으로서의 여성은 수동적이고 풍경일 따름이다. 그러니 현대미술가로서 서유라의 ‘에로틱 아트’는 그것들에 대한 야한 반전을 꿈꾸고 있는 것인지 모를 일이다. 

결과적으로 그의 현대판 ‘책가도’는 책을 그리되 작가적 상상력으로 화면을 재구성한 것이며, 주제어와 더불어 책의 상징과 의미를 타전하는 회화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그의 책가도는 그의 심부에 쌓아 놓은 서가이자 그 서가의 기표들이 떠올라 수없이 다양한 소리로 외침으로 확산되는 확성기다. 소울 트립은 그런 소리에 끌려 심부로 들어가 책들의 기표에 가 닿는 도서기행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A Reading Journey Deep into the Signifiants of Books: Appreciating the Essence of Seo Yura’s Art

Gim Jonggil, Art Critic 

 

Since her first solo exhibition in 2007, titled Piling Books, Seo Yura has devoted her career to portraying books as the main subject of her paintings. Though subject-oriented art has been questioned, there seems to be a distinct reason behind Seo’s insistence on maintaining the subject. What message is she trying to convey by sketching and painting books? We might be able to find an answer based on a number of facts and conceptual characterizations.

First, portraying books through paintings may be regarded as recreating them. Seo’s so-called “book paintings” focus on the exteriors of the books, and it appears that one of her objectives is to recreate the visible physical characteristics of books (visual reality as objects d’art). More often than not, we recognize or perceive a book based on its cover. Once published, a book bears a face that becomes imprinted in the public’s mind.

However, a portrait of a book must be recreated with the aesthetics of portraying its spirit as well as its appearance. Seo’s tenacious efforts might be understood as a determination to paint a portrait of a book in order to deliver its spirit. Yet, projection of such cognition is found in only a limited number of Seo’s paintings portraying books, whereas most of her other work has been reconstructed and reborn based on the artist’s personal thoughts and ideas. In line with morphed colors, tangled texts, and erased images that have been painted over, books don new attire according to the composition or subject of Seo’s paintings. Therefore, her recreations cannot be simply described as restoring visible reality. For Seo, the concept of recreation should be interpreted as an anesthetic form and something akin to a trick.

Seo Yura’s work, Soul Trip, is a recreation of the theme of the exhibition of Soul Trip. While it is somewhat ambiguous whether she is referring to a trip of the mind or that of the spirit, there is a stronger emphasis on “soul” than on “trip,” which is probably because of the psychological weight of the books. What we see in her work is far from exotic scenery or strange wilderness; she simply focuses on the books and the texts printed on their spines. If scattered piles of books are a metaphor for our sophisticated daily life and disoriented urban lifestyle, the residual images in hues of violet reveal our inability (and therefore our earnest desire) to escape from reality. This escape has been exaggerated by the idea of traveling. Accordingly, the titles printed on individual books recreate such a psychological mechanism. The words of the titles also can become verses in a poem:

What is the true nature of what Seo is trying to recreate? Let us take another close look at the texts laid out like verses of a poem. The shapes of books and the texts printed on the shapes - are nothing less than signifiants.

Second, the fact that Seo focuses on the cover and the spine of the books can be regarded as recreating their signifiants. According to Saussure’s theory of semiotics, a book cover corresponds to a sound. As spoken language consists of sound and semantics, the cover of a book is an external format for delivering meaning via sound to be recognized through the reader’s eyes. A book cover is a signifiant that corresponds to speech and is the most difficult and intricate aspect in book design. Compositions of spaces that constitute the outside of a book, including front and back covers, the spine, and the flaps, take on various shapes and colors according to the construction, character fonts, and amount of information contained in the book. The objective of book design is to allow a potential reader to listen to the sound of the book at a first glimpse. Seo recreates the signifiant rendered by a book cover. Therefore, a title of her work is bound to be introduced before the finished result. Titles such as Man and Woman, Modern Women, and Style Book are products of deductive reasoning. Books in Seo’s work are selected and reconstructed based on their topics.

However, the artist’s subjective perspectives are too strong to regard these symbolic devices to be at the forefront.

A screen is constructed based on arrangements and layouts of books. This is why we belatedly realize that the depiction of books in various configurtions - piled up, open, standing, flipped over, scattered - are closely associated with the narrative of the subject.

The title of one of Seo’s works, An Intimate History of Humanity is borrowed from a book with an extension to the title, An Intimate History of Humanity - An Account of People’s Experience Living within My Mind, written by Theodore Zeldin and translated into Korean by Kim Taewoo. The book is featured as the main subject of the painting, and the cover appears familiar and reminds the viewer of the premise known about the book while inexplicably attracting attention. On the cover is a half-naked woman and a sensuous hand lightly pinching her nipple, an image that cannot be easily erased from the mind. However, surrounding the main subject are books with titles such as The

First, What Life Was Like, World History - East Asia and Greece, History of the World, History of War, Decisive Moments in History, and Power & Greed. If An Intimate History of Humanity is a testimony to the author’s thoughts rather than an intimate account of history, the text on the book’s spine is a voiced version of the thoughts in spoken words.

As with many history books, the texts contained in books selected based on subjective criteria allow the painting to be understood from visual recreation to symbolic reincarnation.

From this viewpoint, the psychological symbols in Movie Storybook go beyond the recreation of books. The unique aspect of this work is that book covers, spines, and texts are not emphasized.

While the question, “What is a film?” is conspicuous, most of the books in the painting are pushed away from the focus into hiding. There are only few discernable texts - Movies for Women, Charlie

Soul Trip
A Trip Tinged with Colors
Finding Hidden Destinations in Korea
The Romance of Traveling through Small Cities
1001 Natural Wonders You Must See Before You Die

People and Stories from the Global Village
New Zealand, a Country that Enchants My Mind
New York: Art in the City
London Project
A Stroll through the Alleys in Eastern Europe at 5:00 p.m.
A History of Explorers’ Maps
A Trip that Ended in India 50

Chaplin, Digital Cinema, The Art of Film, History of World Film, 1001 Movies You Must See Before
You Die, New Media Art, and Star Wars.
 

A greater number of books are trying to insert themselves among these titles. This desire to “insert” herself stems from the artist’s subjective viewpoint, perhaps because fascination with films starts from the unknown rather than from something she already knows.

Further, recreating books through paintings involves reinventing the signifiant of the books with the intention of symbolization. A cover of a book acts as a signifant and a signifie simultaneously. If the sound of spoken language is a signifiant, the semantics is the signifie. Seo implies and radiates the meaning behind her subjects through the covers and spines of the books as well as the flaps that occasionally reveal some text. When Seo’s work is understood as a signifie, the books become a metonym of symbols rather than that of physical properties. If Seo wanted to emphasize physical properties, she would have paid close attention to surrealistic expression of the books; however, gathering and arranging all sorts of books, erasing images and instilling new meaning can only be interpreted as a strategy for creating semantics along with the sounds produced by the books. Her series of activities - from establishing the dominant color according to the subject underlined by the title, to selecting the representative images and the books to be portrayed, as well as adjusting what should and should not be read as signifiants - is her calculated effort toward symbolism.

In Erotic Art, books are painted red on a pink background, transforming the books into a complete signifiant. Further, the signifiant is difused into a signifie of red sound. The red sound produced by the red books is the color and the symbol; the former yields an erotic atmosphere, and the latter is associated with femininity. The signifiant is combined with the signifie to create a singular sound, or a voice, which equates to the activity represented by the texts. Women, Sexuality, State is a resistive voice created from a feminist’s perspective regarding institutional sexual orientation, and Women, Art, Society demonstrates how women and the arts that use women as subjects integrate with society. Titles such as Korean Genre Painting, Erotic Korea, Why Artists Portray Women, Aesthetics of Sexuality, Sexuality in Korea, Art and the Human Body, and Mary Wollstonecraft: A Revolutionary Life and Passion that Changed the World allow us to realize why eroticism symbolizes femininity. 

Among them is a book titled Understanding Korean Paintings. Only a very limited number of artworks have used women as subjects in Korea or elsewhere. Art has never been erotic. What we refer to as erotica are not symbols or eroticism but mere objectifications of sexuality, and the women portrayed in those works are nothing more than part of passive scenery. As a modern artist, Seo may be dreaming of a risque turnaround with her erotic art.

Seo’s modern version of chaekgado (Korean traditional portrait of books) is a reconstructed screen of books arranged based on the artist’s imagination. Moreover, Seo’s paintings convey the symbols and semantics of the books as well as their subjects. Accordingly, her works constitute a private bookshelf built in her heart and act as an amplifier that enhances the voice created by the signifiants of the books on her shelf. Soul Trip is a reading journey into the depth of signifiants drawn by the sounds produced by the books.